횡설수설 영화리뷰2013. 5. 22. 09:53

(참고로 모든 오프닝은 당시에 쓴 겁니다. 유의 부탁 드립니다.)

 

이번주 레이스도 슬슬 그 끝이 보이고 있습니다. 솔직히 혈투는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에서 결국에는 적당히 넘어가는 선으로 합의를 보고 말았죠. 당장에 그 다음주에도 작품성 죽이는 작품들이 줄줄이 공개를 해 대는 통에, 이 영화 까지 포용을 하기는 제 상황이 시간적으로, 금전적으로 모두 여의치가 않아서 말이죠. (책을 너무 많이 샀다는......여기에 공개 안 한 책도 수두룩 합니다;;) 그래도 이런 영화는 봐야죠.

그럼 리뷰 시작합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굉장히 묘한 영화를 많이 찍었습니다. 솔직히 그 점 덕에 레슬러 이전까지 걱정을 한 부분들이 굉장히 많기도 하고 말입니다. 실제로 레슬러 바로 직전의 작품인 천년을 흐르는 사랑의 경우가 가장 복잡한 경우에 속했습니다. 이 영화의 경우는 시간과 감각, 그리고 스토리의 흐름이 너무 빽빽하게 차 있는 나머지 정보 과잉으로 인해서 영화가 극도로 어렵고 복잡하며 오히려 너무 지겹다는 평가를 들은 바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좋게 평가를 하자면 보면 볼 수록 새로운 부분이 많다고 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제가 보기에도 좀 심하게 어려워서 지겹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그 이전의 작품의 경우인 레퀴엠 역시 대단히 복잡한 작품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작품의 경우는 꽤 좋은 평가를 받은 바 있었는데, 일단 기본적으로 마약 중독자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면서 감각의 흐름이라는 부분에 영화를 맡기면서도, 동시에 굉장히 캐릭터적인 부분을 잘 끌어 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이 작품의 경우가 바로 이런 것들을 굉장히 잘 해 낸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죠. 일부에서는 이 작품에서 성공한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너무 힘줘서 이후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니냐 하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에는 레슬러라는 영화로 굉장한 연출력을 보여줍니다. 이번에는 오직 레슬링만 아는 한 늙은 아저씨의 사랑과 좌절에 관한 부분들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죠. 이 영화에서는 오직 레슬러인 랜디 더 램 로빈슨의 뒤를 악착같이 따라다니면서 동시에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그의 감정과 그에 따른 행동을 영화에서 계속해서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의 역할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의 종말까지 카메라가 악착같이 따라 붙으며,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관객들이 고통을 느끼면서도 동조를 하게 만든 겁니다.

어찌 보면 블랙 스완이라는 영화는 그러한 분위기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안정이 되지 않는 한 인간을 그리면서, 오직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이 슬슬 끝을 향해 달려가는 그런 영화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 영화는 레슬러와는 전혀 다른 화법으로 영화를 진행을 하고 있습니다.

레슬러에서는 주로 사람의 감정중에서 사랑과 안정, 그리고 자신이 희열을 느끼는 것에서 보여지는 인간적인 고통을 다루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었습니다. 미키 루크는 이런 면을 굉장히 잘 다루면서, 자신의 인생에 새로운 기회가 또 다시 올 것인가 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과연 일반적인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는 것에서 자신도 어떤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고민을 동시에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이번 블랙 스완에서 보여지는 감정의 폭발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에서는 스스로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정확히는 그 통제 속에 갇힌 한 여자가) 그 통제를 깨고 폭주를 하는 (그냥 쉽게 표현을 하면 그렇다는 이야기 입니다. 영화는 그런 부분들을 훨씬 복잡하게 표현을 하고 있답니다.) 그런 이야기를 영화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상당히 어려운 것이자, 뭔가 매우 다른, 그러면서도 공통적인 영화가 탄생을 한 셈이죠.

사실 이 작품에 관해서는 이미 레슬러와 비교를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감독이 스스로 뭘 잘 하게 되었는지에 관해서 가장 멋지게 보여준 영화인 레슬러와 그 이후 작품인 블랙 스완, 상당히 다른, 하지만 비슷한 배경을 지닌 그런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진행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실제로 이 두 작품이 오직 배경만 다른 비슷한 작품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습니다만, 영화 전체를 보자면 이 우려를 바보같게 만드는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에서의 주인공인 니나는 바로 그런 부분을 투영하는 가장 좋은 인물입니다. 작품에서 주인공이기도 한 그녀는 그녀의 성장과 일종의 파괴를 한 번에 겪는 인물로 나옵니다. 이 성장은 굉장히 복잡한 것으로, 그녀가 어떤 새로운 도전에 관해서 이뤄야 하는 상황에서 발현이 되기 시작하는 부분에서 발생을 하기 시작을 하죠. 이 성장사는 굉장히 고통스럽고, 주변에서는 이 성장에 관해서 이해를 못합니다. 오직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만이 그녀의 성장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동시에 이 영화의 가장 괴리적인 부분들 받아들이게 하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영화상에서 니나는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인물입니다. 아는 것은 하나밖에 없고, 그 하나만을 위해서 살고 있으며, 주변 환경 역시 그렇게 알게만 통제가 된 환경입니다. 심지어 그녀의 부모 역시 그녀의 그런 환경에 일조를 하고 있죠. 이쯤에서 보여지는 것은 역시나 그녀의 재능과 결부된 그녀 부모의 욕망의 대체 발현이라는 부분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부분을 점점 더 강화해서 보여주고 있으며, 그 예상을 대사 한 줄로 모두 요약을 하면서도 그 대사 한줄이 모든 힘을 발휘하게 만듭니다.

이 성장 환경에서 자란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아는 한계 밖으로 나가야 하는 상황을 겪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관해서 최고가 되기 위한 부분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그 부분은 굉장히 복잡하고 충격적인 부분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실제로 이 부분을 깨기 위한 여정이 바로 이 영화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보여지는 부분입니다.

이 영화에서 만약 이 성장사가 주된 부분으로, 오직 성장사로 마무리가 되었다면, 말 그대로 우리가 잘 아는 헐리우드의 그렇고 그런 개인 성공 스토리가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이 성장의 부분이 결국에는 그녀가 바라보고 있던 밝은 곳 이면의 어두운 면으로의 항해라는 점으로 이 영화가 감으로 해서 영화의 톡특함을 유지를 하는 것이죠. 이 부분이 바로 이 영화의 최대 특징이고 말입니다.

이 어두운 면으로의 성장은 굉장히 복잡합니다. 니나는 스스로의 성공을 위해서 엄청나게 노력을 하며, 그 노력을 위해서 자신을 무너트리는 행위를 합니다. 물론 스스로 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녀 주변의 사람들은 그런 그녀의 행동을 그냥 가볍게 받아들입니다. 심지어는 가둔 사람도 말이죠. (사실 이 가둔 사람의 경우는 갇힌 사람만큼이다 특이해서 일단은 예외 조항정도로 해석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면은 결국에는 침식이라는 면과 공시에 찾아옵니다. 이 침식을 이 영화에서는 굉장히 감각적으로 표현을 하는 겁니다. 이 침식은 굉장히 유혹적으로 찾아와서, 그녀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키기는 하지만, 니나의 욕망은 이 마음의 침식을 결국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그녀는 스스로 완벽해진다고 스스로를 믿게 만든 것이죠. 실제로 그녀는 스스로의 완벽을 얻습니다만, 그와 동시에 파멸이 찾아 옵니다.

이 영화에서는 바로 이런 과정을 매우 강렬하고 세세하게 묘사를 합니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매우 제한적인 시선으로 움직입니다. 영화에서 니나가 화면에서 나오지 않는 경우는, 니나가 바라보는 것이 무엇인지 부각을 해야 할 때만 그렇게 됩니다. 결국에는 사람들은 니나가 무엇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그녀가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생각하는지만 알 수 있습니다. 그 외의 영역은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영화는 알고 있고, 그런 면을 관객도 받아들이게 하는 위력을 발휘 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관객들은 니나의 감정을 알아가게 됩니다. 그녀의 욕망에 따른 성장과 분열, 그리고 그 밑에 깔린 욕망의 상승 작용을 관객들은 세세하게 관찰을 할 수 있는 것이죠. 이 영화는 바로 이런 것들에 관해서 부각을 합니다. 이 부각은 결국에는 작품을 오직 니나의 시각에서 받아들이게 하는 것도 있지만, 동시에 관객의 시각을 제한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는 니나의 상상과 현실의 기묘한 교차점에서, 관객들 역시 이런 부분들을 이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이게 상상인지 오직 니나의 감정에 매달려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관객은 니나의 감정에 더더욱 동화가 되는 겁니다.

게다가 이 영화에서의 화면은 시종일관 니나의 시각과 감정에 의해 불안하게 흔들립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니나가 영화에서 보여주는 그 모든 것들을 시각적인 경험으로 좀 더 극대화 하는 힘을 가지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약간 다른 이야기 이지만, 이런 이유로 인해서 이 영화는 반드시 극장에서 봐야 합니다. 작은 화면에서는 이런 힘이 잘 안 느껴지거든요.) 이 불안하기 짝이 없는 화면으로 인해서 관객들은 영화에 철저하게 빨려들어가는 것이죠. 심지어는 그녀가 보여지는 발레 장면 역시, 고혹과 파멸이라는 두가지 정서를 모두 보여주는 대단기 기묘하면서도 화려한 화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니나의 연기를 맡은 나탈리 포트만이 대략 어떤 연기를 보여줘야 하는가에 관해서 대략적인 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녀가 보여줘야 하는 것은 대단히 고혹적인 면이 등장하는 (뒤로 갈 수록 더해지는 이라는 수식이 더 붙어야 한다죠.) 자신만의 세계만 아는 그런 여성을 연기를 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발레라는 면 역시 대단히 유려하게 표현을 해야 합니다. 이 것들은 그렇게 쉬운 것들이 아닙니다. 결국에는 배우가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모두 완벽하게 동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런 면에서 나탈리 포트만은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심적으로 대단히 흔들리면서, 자신이 아는 것만 알았던 한 여자가 말 그대로 자신의 욕망을 이끌어 내는 그런 모솝을 정말 제대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모습은 그 속에서 굉장히 분열적이 되는데, 그런 것이 바로 이 작품의 최대 매력입니다.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는 이런 매력을 배가시킬 뿐만이 아니라, 영화의 가장 중심적인 면모를 전달하는 역할까지 모두 해 냅니다.

문제는 이 주변 사람들입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욕망에 의한 통제, 그리고 누군가는 그녀에게 욕망을 가르쳐주고, 그 욕망의 한 가운데 서 있었으나 나락으로 빠진 사람, 그리고 그 욕망을 촉진하는 사람이 동시에 발현이 되고 있습니다. 각자의 인물들은 이런 부분들을 상징을 하면서 동시에 촉발이라는 것과 충돌이라는 두가지 면모를 동시에 잘 활용을 하는 영화의 면모를 부각을 시키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뱅상 카셀은 굉장히 재미있는 스타일의 연기를 보여줍니다. 그의 연기는 굉장히 묘한 데가 있는데, 특유의 프랑스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관능의 촉발이라는 부분을 굉장히 잘 이해를 하는 연기를 전에도 꽤 보여준 바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뱅상 카셀이 하는 역은 그런 스타일의 연장선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굉장히 만족스럽습니다. 사실, 전 그가 좀 코믹하게 나온 부분이 많은 영화를 본지라, 그가 열을 조금만 받았다 하면 마구 불어를 날리는 그런 부분을 봐 와서 그런지,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좀 자제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반면에 니나의 부모 역으로 나오는 바바라 허쉬의 경우는 자신의 못다한 욕망을 오질 딸 애를 장난감 내지는 자신의 인형마냥 키우면서 자신의 대리만족을 하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딸애가 무슨 유리조각인것 마냥 보호하는 그런 역할로 나옵니다. 이 굉장히 애매한 배역은 사실 그렇게 희귀한 것은 아닙니다만, 바바라 허쉬는 이 배역을 매우 파괴적인 면모로 소화를 해 내고 있습니다. 애초에 뭔가 정상이 아닌 느낌이기는 하지만, 바바라 허쉬는 포인트를 잡아서 그 기묘한 면모를 더 부각을 시켰죠. 덕분에 영화에서의 니나의 폭발이 더더욱 부각이 되고 말입니다.

밀라 쿠니스의 경우는 이 영화에서 정말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퇴폐적인 미학과 건강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그녀는 이 영화에서 욕망의 촉진제로 이용이 되는데, 이 영화에서 그녀는 이미 이 욕망에 관해서 잘 알고 있는, 그리고 이 영화에서 재능을 이미 가진 니나가 가지지 못한 면을 가진 그런 못브을 영화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밀라 쿠니스는 바로 이 점을 매우 잘 부각을 하고 있죠.

위노나 라이더의 경우는 좀 특이합니다. 사실 그녀의 인생을 생각을 해 보면,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그녀의 모습은 사실상 위노나 라이더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볼 수 있는 수준입니다. 이 기묘함에서 그녀에게 느껴지는 것은, 그녀가 보여줄 수 있는 파괴적인 면모의 종말과 그 끝에 도사리고 있는 파멸의 전조를 보여주는, 그리고 니나에게는 이 영화에서의 그녀의 한 분분이라고 할 수 있는 춤에 관한 부러움과 질투심을 동시에 갖게 만든 면모를 이미 지녔던 그런 여성을 연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녀에게 연기랄 것은 별로 없습니다만, 그래도 존재감은 꽤 됩니다.

제가 이렇게 캐릭터를 일일이 소개를 한 것은, 결국에는 이 영화가 캐릭터 영화이기 때문입닏. 이 영화에서 욕망을 만들어 낸 것도 인간이고, 인간이 예술을 하고, 그 예술을 보는 것도 인간이기 때문이죠. 이 영화에서 가장 기묘한 점이라면, 가장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예술이 결국에는 완벽을 위해서 누군가를 파괴를 하는 과정의 종착역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이 영화에 관해서 상당히 좋은 평가를 내리신 바 있습니다. 제 평가도 같습니다. 이 영화는 정말 좋은 영화이며, 말 그대로 한 인간에 관해서 싫어하면서도 끝까지 볼 수 밖에 없는, 그리고 힘겨우면서도, 그 과정이 또 한 번 보고 싶게 만드는 그런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P.S 리뷰 길이가 굉장히 긴데, 사실 2부로 나뉘어 있던 물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에는 상당 부분을 줄여버리고, 1부로 올리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리뷰가 계속 밀릴 상황이 도래를 해 버려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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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피니